
워호스 스튜디오의 '킹덤 컴 딜리버런스 2'가 출시 한 달도 안 돼서 500만 장을 팔았다. 체코의 작은 개발사가, AAA급 마케팅 예산도 없이, 반지의 제왕이나 위처 같은 유명 IP도 없이 이룬 성과다. 더 놀라운 건 이 게임이 불편하기로 유명하다는 점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하고, 더러우면 씻어야 한다. 갑옷은 여러 겹 껴입어야 하고, 칼싸움은 현실처럼 어렵다. 패스트 트래블도 제한적이고, 세이브도 마음대로 못 한다. 이런 게임이 2025년에 500만 장이나 팔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유로정크' 장르의 부활

킹덤 컴은 소위 유로정크 장르의 정점이다. 유로정크는 유럽(주로 동유럽) 개발사가 만든, 기술적으론 조금 투박하지만 야심찬 시도로 가득한 게임을 가리킨다. 고딕, 스토커, 메트로 시리즈 같은 게임들이 여기 속한다.
NOTE 잠깐! 이 용어는?
유로정크: 동유럽 개발사의 AA급 게임을 칭하는 애칭. 버그도 많고 UI도 불편하지만, 독특한 분위기와 깊이 있는 시스템으로 컬트적 인기를 끈다. '정크(junk)'는 폄하가 아니라 거친 매력을 뜻한다.
이 장르는 2010년대 중반 거의 사라질 뻔했다. AAA 대작은 수억 달러를 쓰며 화려해졌고, 인디 게임은 작지만 창의적으로 승부했다. 그 중간의 AA급 게임, 특히 유로정크는 설 자리를 잃었다. 투자 대비 수익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킹덤 컴이 이 흐름을 뒤집었다. 1편이 2018년 출시됐을 때도 성공적이었지만, 2편은 그 이상이다. 스팀 동접자 수 10만 명, 메타크리틱 점수 80점대 후반, 무엇보다 입소문이 무서웠다. "불편하지만 중독된다"는 리뷰가 쏟아졌다.
사실주의 중세 RPG의 철학
킹덤 컴의 핵심은 사실주의다. 판타지가 아니라 역사다. 1403년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을 배경으로, 대장장이 아들 헨리가 복수를 위해 성장하는 이야기다. 드래곤도 없고, 마법도 없고, 선택받은 영웅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청년이 칼 쓰는 법을 배우고, 사람을 죽이고,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 철학은 게임 디자인 전체를 관통한다. 위처처럼 한 번에 다섯 명을 벨 수 없다. 현실에선 갑옷 입은 기사 한 명도 이기기 어렵다. 그래서 싸움은 신중해야 하고, 때론 도망치거나 협상해야 한다.
NOTE 잠깐! 이 용어는?
방향별 공격/방어 시스템: 마우스나 스틱 방향으로 상단/중단/하단 공격과 막기를 선택하는 전투 방식. 모탈 컴뱃이나 포 아너에도 쓰이지만, 킹덤 컴은 이걸 중세 검술에 맞게 구현했다.
전투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상단/중단/하단 방향으로 베고, 찌르고, 막는다. 타이밍과 스태미나 관리가 핵심이다. 처음엔 짚 인형도 못 이기지만, 숙련되면 리듬 게임처럼 흐른다. 이건 마치 악기 연습 같다. 처음엔 소음이지만, 연습하면 음악이 된다.
생존 메카닉의 불편함
| 요소 | 킹덤 컴 2 | 스카이림 | 위처 3 |
|---|---|---|---|
| 배고픔 시스템 | 필수 (안 먹으면 스탯 하락) | 모드로만 가능 | 없음 |
| 수면 관리 | 필수 (안 자면 피로 누적) | 선택 사항 | 명상으로 대체 |
| 장비 내구도 | 세밀함 (부위별 손상) | 간단함 | 간단함 |
| 세이브 방식 | 특수 아이템 필요 | 언제든지 | 자동+수동 자유 |
| 패스트 트래블 | 제한적 (캠프 간) | 자유로움 | 자유로움 |
이 표를 보면 킹덤 컴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 수 있다. 다른 RPG들이 생략하거나 선택 사항으로 둔 걸 전부 강제한다. 배고프면 이동 속도가 느려지고, 피곤하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갑옷은 여러 겹(언더 아머, 체인메일, 플레이트) 껴입어야 하고, 피 묻은 옷으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경계한다.
그런데 이 불편함이 몰입을 만든다. 스카이림에선 세계를 구하는 영웅인데도 현실감이 없다. 드래곤을 죽이고 10초 뒤에 닭을 훔쳐도 아무렇지 않다. 킹덤 컴은 다르다. 사슴 사냥에 성공하면 정말 뿌듯하다. 처음으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을 때의 감동은 레벨 100 찍는 것보다 크다.
전투의 역설 — 어려움이 재미다

킹덤 컴의 전투는 어렵다. 1편 초반에 튜토리얼도 제대로 못 받고 전투에 던져져서 좌절한 사람이 많다. 2편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3대 1 싸움은 거의 자살 행위고, 활 쏘기는 조준점도 없어서 감각으로 익혀야 한다.
NOTE 잠깐! 이 용어는?
스태미나 관리: 공격, 방어, 회피할 때마다 소모되는 체력. 바닥나면 공격력과 방어력이 급감해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현실의 지구력을 구현한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 성취감을 극대화한다. 다크 소울이 그랬듯, 어려운 게임을 깨는 쾌감은 쉬운 게임의 10배다. 처음으로 기사 1대1 대결에서 이겼을 때, 처음으로 말을 타고 활로 산적을 맞췄을 때의 희열은 잊을 수 없다.
더 흥미로운 건 비폭력 플레이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화술 스킬을 올리면 대부분의 전투를 말로 해결할 수 있다. 은신 스킬로 잠입할 수도 있다. 이건 마치 체스 같다. 같은 판도 여러 방식으로 풀 수 있다.
인디/AA 스튜디오의 가능성

워호스 스튜디오는 직원 수 250명 정도의 중견 개발사다. 유비소프트(2만 명)나 베데스다(수천 명)에 비하면 작다. 예산도 추정 5천만 달러 수준으로, 스타필드(2억 달러)나 GTA 6(10억 달러 추정)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가 오히려 강점이 됐다. 큰 회사는 주주와 퍼블리셔 눈치를 봐야 해서 안전한 선택만 한다. 오픈 월드 RPG면 당연히 마법과 괴물을 넣고, 전투는 쉽게 만들고, 세이브는 언제든 되게 한다. 그래야 대중적이니까.
NOTE 잠깐! 이 용어는?
AA급 게임: 제작 규모와 예산이 AAA(대작)와 인디의 중간인 게임. 보통 5천만~1억 달러 예산에 100~300명 팀. 리스크를 감수하고 실험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스위트 스팟'이다.
워호스는 작기 때문에 과감한 선택이 가능했다. "배고픔 시스템 넣으면 대중성 떨어진다"는 반대를 무시하고 넣었다. "전투 어려우면 라이트 유저가 이탈한다"는 걱정도 무시했다. 대신 확고한 팬층을 노렸다. 역사 매니아, 하드코어 RPG 팬, 시뮬레이션 좋아하는 사람들.
결과는 대성공이다. 500만 장이면 매출 약 2억 5천만 달러(정가 50달러 기준)다. 제작비를 5배 이상 회수했다. 이건 AAA 대작보다 훨씬 건강한 수익률이다. GTA 6는 10억 달러 썼으니 본전 찾으려면 2천만 장은 팔아야 한다.
AA 스튜디오의 장단점
| 요소 | AAA 스튜디오 | AA 스튜디오 | 인디 스튜디오 |
|---|---|---|---|
| 예산 규모 | 1억~10억 달러 | 5천만~1억 달러 | 100만~1천만 달러 |
| 개발 기간 | 5~8년 | 3~5년 | 1~3년 |
| 위험 감수 | 낮음 (안전 우선) | 중간 (틈새 공략) | 높음 (실험적) |
| 기술 수준 | 최첨단 | 중상급 | 다양 |
| 실험성 | 제한적 | 가능 | 자유로움 |
| 수익성 | 대박 or 쪽박 | 안정적 가능 | 불안정 |
이 표에서 AA의 매력이 보인다. AAA처럼 수백억을 걸지 않아도 되고, 인디처럼 기술적 한계에 막히지도 않는다. 적당한 예산으로 특정 취향을 깊게 파고들 수 있다. 킹덤 컴이 정확히 이 전략을 썼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 — '불편한 게임'의 미래
개인적으로 킹덤 컴 2의 성공은 게임 업계에 희망적인 신호다. 모든 게임이 쉽고 편해질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은 퇴근 후 30분 힐링 게임을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주말에 10시간 몰입할 하드코어 경험을 원한다.
문제는 후자를 위한 게임이 점점 사라졌다는 거다. 스카이림도, 폴아웃도, 심지어 다크 소울도 속편이 갈수록 접근성을 높였다. 나쁜 건 아니지만, 동시에 뭔가를 잃었다. 킹덤 컴은 그걸 되찾았다.
배고픔 시스템이 귀찮다고? 그게 바로 역할극이다. 내가 중세 보헤미아의 대장장이 아들이 된 기분을 느끼려면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전투가 어렵다고? 현실의 칼싸움이 쉬울 리 없다. 처음엔 못해도 연습하면 늘고, 그 성장 곡선 자체가 재미다.
다만 이런 게임이 대중화되긴 어렵다. 킹덤 컴은 500만 장 팔았지만, 엘든 링(2천만 장)이나 위처 3(5천만 장)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게임이 천만 장 팔 필요는 없다. 틈새 시장도 시장이다.
NOTE 잠깐! 이 용어는?
틈새 시장(Niche Market): 전체 시장의 작은 부분이지만, 특정 수요가 뚜렷한 시장. 킹덤 컴의 틈새는 '하드코어 역사 시뮬레이션 RPG 팬'이고, 이게 500만 명이나 된다는 게 놀랍다.
앞으로 더 많은 AA급 '불편한 게임'이 나오길 바란다. 스토커 2도 그렇고, 다음 고딕 리메이크도 기대된다. AAA 대작과 캐주얼 모바일 게임 사이에서, 이런 게임들이 게임 문화의 다양성을 지킨다.
마무리
킹덤 컴 딜리버런스 2의 500만 장 판매는 단순한 상업적 성공이 아니다. '게임은 편해야 팔린다'는 통념에 대한 반박이다. 불편해도, 어려워도, 배우는 데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만들면 사람들은 산다.
워호스 스튜디오는 증명했다. 할리우드급 예산 없이도, 반지의 제왕 같은 IP 없이도, 오히려 불편함을 무기로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이 게임을 하다 보면 다른 RPG가 얼마나 많은 걸 생략하고 간소화했는지 깨닫게 된다.
1403년 보헤미아에서 배고픔과 피로와 싸우며, 칼 쓰는 법을 배우고, 한 명 한 명 쓰러뜨릴 때마다 성장하는 경험. 이게 진짜 역할극이다. 편한 게임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불편한 리얼리즘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킹덤 컴 2는 그 경험을 완벽하게 제공한다.
참고
- https://game.donga.com/121542/
- https://www.pcgamer.com/games/rpg/three-years-after-its-last-update-the-original-kingdom-come-deliverance-gets-a-new-patch-that-includes-a-new-caparison-for-your-h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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