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 Gamer가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한 RPG 개발자의 발언을 인용했는데, "우리는 게임에서 물리 같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라는 내용이다. 그는 이어서 "플레이어들은 정적인 3D 환경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인터랙티브한 게임을 원한다"고 말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게임 그래픽은 매년 발전하는데 물리가 퇴보한다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2004년 Half-Life 2의 그래비티 건으로 물건을 집어던지던 그 재미를, 2024년 대작 게임에서 찾기 어렵다.
그래픽은 올라갔는데 물리는 내려갔다

현대 게임들은 엄청나게 예쁘다. 레이트레이싱으로 빛이 실시간으로 반사되고, 4K 텍스처로 나뭇잎 하나하나가 디테일하다. 캐릭터 얼굴은 실제 배우를 스캔해서 만든다. 기술적으로 놀라운 수준이다.
그런데 그 예쁜 나뭇잎을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다. 탁자 위의 컵은 장식일 뿐 집을 수 없다. 나무 상자는 파괴 불가능한 벽이다. 게임은 점점 더 박물관처럼 변하고 있다. 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못하는.
NOTE.
레이트레이싱(Ray Tracing): 빛의 경로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사실적인 반사, 그림자, 조명을 구현하는 기술. GPU 자원을 엄청나게 많이 쓴다.
2004년 Half-Life 2는 물리엔진이 게임플레이의 핵심이었다. 그래비티 건으로 톱날을 적에게 날려 죽이거나, 무거운 물체로 장애물을 눌러 길을 열었다. 2007년 Crysis는 나무를 쓰러뜨려 다리로 쓸 수 있었고, 건물을 폭파해 적을 깔아뭉갤 수 있었다. 2008년 GTA 4는 차량 물리가 너무 정교해서 운전 자체가 미니게임이었다.
그런데 2024년 대작들은? 그래픽은 Crysis보다 10배 좋지만, 상호작용은 오히려 퇴보했다. 마치 고해상도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아름답지만 만질 수 없다.
GPU 자원의 제로섬 게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답은 GPU 자원의 제로섬 게임이다. GPU 성능은 해마다 올라가지만, 그래픽 요구도 같이 올라간다. 아니, 더 빠르게 올라간다.
레이트레이싱이 대표적이다. 레이트레이싱은 GPU 자원을 미친 듯이 먹는다. RTX 4090으로도 4K 레이트레이싱을 60fps로 돌리기 어렵다. DLSS나 FSR 같은 업스케일링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NOTE.
DLSS/FSR: AI 또는 알고리즘 기반 업스케일링 기술. 낮은 해상도로 렌더링한 후 고해상도로 확대해서, GPU 부담을 줄이면서도 화질을 유지한다.
그러면 물리 시뮬레이션에 쓸 자원이 없다. 물리 계산도 GPU(또는 CPU) 자원을 많이 쓴다. 특히 오브젝트가 많아지면 계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00개의 오브젝트가 서로 충돌 검사를 하려면 100×99/2 = 4,950번의 검사가 필요하다.
개발사는 선택해야 한다. GPU 자원을 레이트레이싱에 쓸 것인가, 물리 시뮬레이션에 쓸 것인가. 대부분 레이트레이싱을 선택한다. 스크린샷이 예쁘게 나와야 마케팅에 유리하니까. 물리 상호작용은 플레이해봐야 아는데, 레이트레이싱은 트레일러만 봐도 안다.
마치 식당이 맛보다 인테리어에 투자하는 것과 같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은 예쁘지만, 정작 음식 맛은 평범하다.
| 요소 | 2004년 Half-Life 2 | 2024년 현대 대작 |
|---|---|---|
| 그래픽 | 낮음 (당시 기준 최고) | 극상 (레이트레이싱, 4K) |
| 물리 상호작용 | 높음 (그래비티 건, 파괴 가능 환경) | 낮음 (대부분 정적) |
| GPU 자원 배분 | 물리에 많이 할당 | 그래픽에 올인 |
| 인터랙티비티 | 게임플레이 핵심 | 스크립트 이벤트만 |
오픈월드의 딜레마
오픈월드 게임이 늘어난 것도 물리 퇴보의 원인이다. 좁은 맵에서는 모든 오브젝트에 물리를 적용해도 괜찮다. 하지만 100km² 오픈월드에서 모든 나뭇잎, 돌멩이, 풀잎에 물리를 적용하면? GPU가 녹는다.
그래서 오픈월드 게임들은 대부분 정적 환경을 선택한다. 나무는 배경일 뿐 상호작용 불가다. 바위는 장애물일 뿐 밀거나 부술 수 없다. 플레이어는 거대한 박물관을 걷는다.
예외는 있다.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오픈월드면서도 물리 상호작용이 게임플레이의 핵심이다.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고, 바위를 굴려 적을 깔고, 오브젝트를 조합해 기계를 만든다. 닌텐도는 그래픽을 희생하고 물리에 투자했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의 그래픽은 PS3 수준이지만, 게임플레이는 2024년 최고다.
NOTE
오픈월드(Open World): 플레이어가 넓은 맵을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게임 구조. GTA, 젤다, 스카이림 등이 대표적이다.
인디 게임 '노이타(Noita)'도 극단적인 물리 시뮬레이션을 한다. 모든 픽셀이 물리 법칙을 따른다. 물은 흐르고, 불은 번지고, 폭발은 지형을 파괴한다. 그래픽은 2D 픽셀 아트지만, 물리 시뮬레이션은 3D AAA 게임보다 복잡하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그래픽을 택할 것인가, 인터랙티비티를 택할 것인가. 대부분의 AAA 게임사는 그래픽을 택했다.
물리가 살아있는 게임들

그렇다고 모든 게임에서 물리가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물리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게임들이 있다.
발데스 게이트 3는 환경 상호작용이 뛰어나다.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 번개를 떨어뜨려 적을 감전시킬 수 있다. 상자를 쌓아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폭발물로 벽을 부술 수 있다. 턴제 RPG라서 실시간 물리 계산 부담이 적기 때문에 가능했다.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앞서 말했듯 물리가 게임플레이의 핵심이다. 울트라핸드로 오브젝트를 자유롭게 조합하고, 리콜로 시간을 되돌리고, 퓨즈로 무기를 합성한다. 모두 물리엔진 기반이다.
노이타는 픽셀 단위 물리 시뮬레이션으로 아예 물리엔진 자체가 게임이다. 매 플레이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진다. 마법이 연쇄 폭발을 일으켜 자기 자신을 죽이기도 한다.
이 게임들의 공통점은? 그래픽을 희생했다는 것이다. 발데스 게이트 3는 턴제라 실시간 부담이 적고, 티어스 오브 더 킹덤은 그래픽이 구세대 수준이고, 노이타는 2D 픽셀 아트다. 물리를 살리려면 그래픽을 양보해야 한다.
게임의 본질은 인터랙션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게임의 본질은 인터랙션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영화와 게임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현대 게임들은 점점 영화처럼 변하고 있다. 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못한다. 스크립트 연출은 화려한데, 자유도는 낮다. 정해진 길만 걸으라고 한다.
물론 그래픽도 중요하다. 시각적 몰입감은 게임 경험의 일부다. 하지만 그래픽을 위해 인터랙티비티를 희생하는 건 본말전도다. 마치 차의 외관만 예쁘게 만들고 엔진 성능은 낮추는 것과 같다.
NOTE 잠깐! 이 용어는?
스크립트 연출: 개발자가 미리 정해둔 이벤트나 연출. 플레이어의 선택이나 물리 상호작용과 무관하게 정해진 대로 진행된다.
PC Gamer의 또 다른 기사를 보면, 인기 PC 게임 중 소수만 레이트레이싱을 사용한다고 한다. 플레이어들이 레이트레이싱을 꺼버린다는 뜻이다. 프레임이 떨어지니까. 그렇다면 개발사는 왜 레이트레이싱에 GPU 자원을 쏟아붓는 걸까? 플레이어는 원하지도 않는데.
답은 간단하다. 마케팅이다. "레이트레이싱 지원"이라고 쓰면 프리미엄 게임처럼 보인다. 실제로 플레이어가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트레일러가 예쁘면 그만이다.
마무리
현대 게임은 점점 예뻐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덜 반응한다. 물리 상호작용은 GPU 자원 배분 전쟁에서 졌다. 레이트레이싱과 4K 텍스처가 물리엔진을 밀어냈다.
하지만 일부 게임들은 다른 길을 간다. 그래픽을 양보하고 인터랙티비티를 택한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노이타, 발데스 게이트 3처럼. 그리고 이 게임들이 플레이어들에게 더 오래 기억된다.
게임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예쁜 박물관보다 살아있는 놀이터가 더 재미있다. 개발사들이 이걸 다시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래픽은 올라가는데 재미는 내려가는 게임은, 결국 아무도 하지 않는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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