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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레라는 장르는 사실상 완성된 지 오래됐다. "바보! 착각하지 마!" 이후로 새로 나올 게 있나 싶을 정도로 관용구가 굳어졌고, 웬만한 변주는 이미 누군가 써먹었다. 그런데 2024년 여름, 그 굳은 장르판에 러시아어 하나를 얹어서 신선한 후크를 만든 작품이 나왔다. 제목이 좀 길다 — 가끔씩 툭하고 러시아어로 부끄러워하는 옆자리의 아랴 양. 줄여서 그냥 아랴 양 또는 로쟈데레로 불린다.

 

컨셉 한 줄이면 이 애니가 왜 화제였는지 다 설명된다. 학교 최고 미녀에 성적 1등, 은발 벽안의 하프 러시아인 여주가 옆자리 남주한테 툭툭 러시아어로 데레 대사를 던진다. 근데 남주가 그걸 다 알아듣는다. 여주는 모른다. 이 비대칭에서 웃음과 설렘이 동시에 터진다.

 

무슨 애니냐면

원작은 스나사키 코타로(燦々SUN)가 쓰고 전격문고에서 나오는 라이트노벨이다. 2020년에 1권이 발매됐고, 2024년 기준으로 8권대까지 나와 있다. 애니메이션은 2024년 7월부터 9월까지 한 쿨(12화) 방영됐다. 제작사는 동화공방(Doga Kobo). "야가테 키미니 나루", "그런 사람 아냐", "월간 순정 노자키군" 등 로맨틱 코미디·청춘물을 잘 만드는 스튜디오라고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런 애니다.

 

러시아어라는 언어 방패 뒤에 숨어서 진심을 던지는 히로인, 그리고 그 방패를 뚫고 다 알아듣는 남주. 이 비대칭이 만드는 코미디와 로맨스.

 

비유하면 카드 게임에서 상대가 자기 패를 다 보여주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는 상황이다. 여주는 "이 남자는 러시아어를 못 하니까 살짝 데레 대사를 흘려도 되겠지" 하고 마음을 열지만 남주는 그걸 실시간으로 다 번역해서 듣는다. 이걸 남주가 굳이 티 내지 않고 넘어가는 게 이 관계의 묘한 균형이다. 마치 제 3자인 우리의 시선을 남주가 대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하는데, 이점때문에 더더욱 몰입이 되는 애니가 아니었나 싶다.

추가로 개인적으로 매우 즐겨본 '청춘돼지' 시리즈의 애니의 그림체 및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낀 애니였다.

 

캐릭터 뜯어보기



알리사 미하일로브나 쿠죠(아랴)

여주 이름이 길다. 알리사 미하일로브나 쿠죠(九条 アリサ・ミハイロヴナ), 애칭 아랴.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가 러시아인. 은발에 파란 눈, 학교에선 톱 클래스 미녀에 성적도 학년 1등이다. 겉으론 도도하고 차가운데 남주 마사치카한테만 유독 태도가 미묘하다.

 

이 캐릭터의 핵심은 러시아어를 "혼잣말 방패"로 쓴다는 거다. 일본어로는 "너 진짜 재수없어"라고 하면서 러시아어로는 툭 하고 "…근데 좋아해"라는 식의 대사를 흘린다. 이게 본인 딴엔 안전한 감정 배출구인데, 문제는 옆자리 남주가 러시아어 원어민 수준이라는 거다.

 

쿠제 마사치카

남주. 겉으론 게으르고 성적 별로에 관심도 없어 보이는 학생이다. 근데 실은 배경이 화려하다. 외조부가 러시아 쪽 뿌리라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보냈고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알아듣는다. 게다가 예전엔 우수한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일부러 힘 빼고 사는 캐릭터다. 전형적인 힘숨찐이다.

 

이 남주의 매력 포인트는 능력을 감추는 방식이다. 아랴의 러시아어 데레를 다 들으면서도 티를 안 낸다. 대신 상황이 벌어지면 결정적인 순간에 능력을 꺼낸다. 오타쿠 취향에 자기 비하 개그도 잘하는데, 필요할 땐 사람을 리드할 줄 안다. 이 "겉으로만 잉여, 실은 유능함"의 갭이 이 캐릭터를 살린다.

 

스오우 유키

마사치카의 여동생인데 학교에선 그걸 숨긴다. 이유는 좀 복잡한데, 두 사람 부모가 이혼하면서 성이 갈렸고 각자 다른 집에서 컸다. 학교에선 남매지간이 아닌 척한다. 그리고 유키는 오빠 앞에서는 강하게 브라콘 기질이 발동한다.

이 캐릭터가 이야기 구도에서 재밌는 건 아랴에게 유일하게 대적할 만한 존재라는 거다. 미모·성적·집안·능력 모두 아랴급이거나 그 이상인데, 오빠(마사치카)를 두고는 서로 견제한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여동생 포지션이 이렇게 강력한 라이벌로 세팅되는 경우가 흔치는 않다.

 

마리아

  • 마리아: 아랴의 언니. 대학생. 여동생과 정반대로 부드럽고 포용적. 아랴의 감정을 알아채고 은근히 밀어준다.

 

후기) 재미 포인트s

 

1. 러시아어 데레의 신선함

츤데레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러시아어를 활용한 건 이 작품이 사실상 처음인것 같다. 유사한 시도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컨셉을 전면에 내세워서 시리즈 전체를 끌고 간 작품은 드물다

 

일본어로는 "베쟈~ (별로야)"라고 뾰족하게 굴다가 러시아어로 "Хочу быть с тобой(너와 함께 있고 싶어)" 같은 대사를 툭 흘리는데, 이게 자막으로 남주 반응과 함께 나오는 순간 시청자가 대리만족한다. 언어 하나 걸쳤을 뿐인데 감정 표현의 층위가 하나 더 생긴다.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上坂 すみれ)가 아랴 역인데, 이 성우가 실제로 러시아어에 능통한 걸로 유명하다. 대학 전공이 러시아어였고 자기 유튜브에서도 러시아어 관련 콘텐츠를 종종 올린다. 캐스팅이 사실상 필연이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2. 학생회 선거라는 뼈대

이 작품이 단순히 러시아어 개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 중반부터 학생회 선거가 핵심 서사가 된다. 아랴가 학생회장에 도전하고 마사치카가 그 러닝메이트로 붙는다. 반대편에선 유키가 자기 파트너와 함께 대립한다.

 

즉, 남매·라이벌·정치 구도가 겹치면서 러브 코미디에 정치 시뮬레이터 느낌이 얹힌다. "귀엽기만 한 애니"로 넘어가지 않고 나름의 목표와 갈등 구조를 만들어두어서 몰입감을 잘 유지시켜주는것 같다.

 

3. 남주가 유능하다

주인공 남캐릭터가 잉여로만 있으면 이야기가 안 굴러간다. 이 애니의 마사치카는 필요할 때 유능함을 꺼내는데, 이게 러시아어 청해 능력 하나로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 감각, 사람 파악, 협상, 연설 - 결정적인 국면에서 능력을 꺼내는 순간마다 시청자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츤데레 히로인이 매력적이려면 그 츤데레를 받아주는 남주도 스탯이 받쳐줘야 한다는 얘기다. 이 작품은 그 밸런스를 잘 맞췄다.

 

원작 대비 애니의 완성도

라노벨을 애니화하면 늘 나오는 얘기가 있다 - "원작의 어디까지 다뤘나", "각색이 정보 밀도를 얼마나 살렸나".

 

항목 원작 라노벨 애니메이션(1쿨)
러시아어 대사 표현 텍스트로만 성우 실연 + 자막 — 원작보다 강해짐
심리 묘사 마사치카 시점 내면 서술 상세 축약 — 아쉬운 부분
진도 1~3권 초반 커버 학생회 선거 도입까지
개그 템포 여유롭게 배분 12화에 밀어넣어 살짝 빡빡
작화 - 동화공방 준수 — 표정 연기 좋음

 

정리하면 러시아어 대사의 임팩트는 애니 쪽이 훨씬 크다. 성우가 실제로 러시아어를 발음하는 걸 들으면 원작에서 텍스트로 읽던 것과는 다른 감각이 온다. 반대로 남주의 심리 묘사, 특히 과거 회상과 감정선은 원작이 더 촘촘하다.

 

 

아쉬운 점 세 가지

 

  1. 정보 압축. 1기 12화에 캐릭터 소개, 관계 구축, 학생회 선거 도입까지 다 담느라 초반 페이싱이 빡빡하다. 특히 유키·마리아 등 서브 캐릭터가 원작보다 얕게 다뤄진다.
  2. 엔딩이 도입부. 학생회 선거가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시즌이 끝난다. 2쿨이 나오지 않으면 미완결 느낌.
  3. 러시아어 개그의 반복. 컨셉 자체가 강한 만큼 후반부엔 유사 패턴이 반복된다. 시청자가 "또 저 대사구나" 하는 순간이 오면 신선함이 살짝 빠진다.

 

이 세 가지는 사실 라노벨 애니화의 고질적 문제이기도 하다. 원작 진도, 각색 밀도, 컨셉 유지의 삼각 트레이드오프.

 

어떤 사람한테 추천하나

  • 러브 코미디 좋아하는 사람 — 정통파에 가깝다. 왕도 츤데레 + 학원물 + 정치 서사
  • 언어 개그 좋아하는 사람 — 러시아어 원어민 성우의 실연이 하이라이트
  • 최근 로코가 좀 밋밋했다고 느낀 사람 — 러시아어 후크로 신선함을 얹었다
  •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 팬 — 캐릭터가 성우한테 완벽하게 맞는 케이스

 

반대로 추천하기 애매한 경우:

  • 드라마·심리물 위주로 보는 사람 — 이건 로코이자 개그물이라 무겁지 않다

 

마무리

 

가끔씩 툭하고 러시아어로 부끄러워하는 옆자리의 아랴 양은 컨셉 하나로 신선함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러시아어 츤데레라는 후크가 강하고 남주·여주 밸런스도 잘 잡혀 있다. 원작 라노벨이 더 상세하지만 애니는 애니대로 러시아어 실연이라는 강점이 크다.

 

1기를 다 본 다음 남는 감상은 이거다 — 왕도 로맨틱 코미디에도 여전히 새로운 후크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후크가 성우 캐스팅 하나로 극대화된다는 것.

 

시즌 2 방영이 확정되었다는 거 같은데, 얼른 다음 시즌을 이어서 보고싶은 마음이다. 빨리 나오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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